인간은 자유와 선택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만들어 간다.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에서 ‘인간의 원래 모습’이란 없다. 각자는 무엇이 올바르고 바람직한지를 홀로 결정해야 한다. 따라서 ‘불안’은 피하지 못할 우리의 운명이다. 선택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알 수 없을뿐더러, 책임도 오롯이 우리에게 돌아오는 탓이다.
게다가 나의 결정에는 다른 사람의 자유가 필요할 때가 많다. 다른 이들이 나의 뜻을 거절할 때는 어떻게 할까? 꿈이 오롯이 이루어지려면, 내가 죽은 뒤에도 다른 사람들이 내 뜻을 이어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역시 자유롭게 선택하는 존재다. 나의 자유는 이들의 자유에 따라 휘둘릴 테다. 그래서 나는 불안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르트르는 ‘자기기만’에 빠지지 말라고 충고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투덜대곤 한다. “나는 환경이 좋지 않았지. 나는 위대한 사랑을 하지 못했어. 그럴 만한 사람을 못 만났기 때문이야. 나는 좋은 책을 쓰지 못했어.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지. 나는 아낌없이 애정을 쏟을 아이를 낳지 못했어. 삶을 같이할 만한 남자를 못 만났던 탓이야” 등등.
여건이 안 되어서 내가 가진 가능성이 피어나지 못했을 뿐, 나는 소중하고 뛰어난 존재라며 스스로를 ‘기만’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사람의 가치는 가능성이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난다. 생각을 백 번 하면 무엇하겠는가. 인간은 ‘실천’을 통해 자기 스스로를 만들어간다. 다른 사람들이 내 뜻을 따를지 따르지 않을지는 그들의 자유다. 여건이 좋을지 나쁠지도 내가 결정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유롭게 결정하고 실천에 옮기는 것밖에 없다.
자기가 어쩌지 못하는 일에는 책임도 따르지 않는다. 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롯이 나의 몫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탓’과 ‘~때문에’를 입에 달고 산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힘주어 말한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실현하는 한에 있어서만 실존한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남의 결정과 환경에 책임을 돌리지 말라는 뜻이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47349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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